나는 어떻게 디자이너가 됐고, 왜 AI 앞에서 흔들렸나

예상 읽기 시간: 약 4분

입시미술부터 AI까지, 나는 지금도 디자이너가 되는 중입니다

입시미술을 시작하고,
디자인 대학에 들어가고,
4.24라는 학점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디자이너가 될 줄 알았어요.

수업을 빠지지 않고,
과제를 잘 해내고,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제 스타일도 생기고
제가 잘하는 것도 선명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오래 붙잡는 건 꽤 잘했어요.

한 번 궁금해지면 계속 찾아보고,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것저것 바꿔보고,
잘 안 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엉덩이가 무겁다고 해야 하나.

남들이 적당히 마무리하고 넘어갈 때도
저는 혼자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몰랐습니다.


서울에 올라오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디자인을 계속하려면
서울에서 더 많은 작업을 보고,
더 다양한 회사와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았어요.

그렇게 3D와 모션그래픽을 중심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회사마다 작업 방식도 달랐고,
프로젝트마다 요구하는 것도 달랐어요.

브랜드 영상도 만들고,
제품과 공간을 모델링하고,
재질과 조명을 잡고,
모션그래픽과 합성도 했습니다.

NFT 이미지처럼 수백 장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도 있었고,
툰 셰이더와 라이팅을 계속 테스트하는 작업도 있었어요.

새로운 툴을 배워 바로 실무에 투입되기도 했고,
이미 정해진 레퍼런스를 최대한 똑같이 구현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작업을 거치면서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조금씩 알게 됐어요.

저는 완전히 정해진 답을 빠르게 복제하는 일보다,
원하는 느낌에 도달할 때까지
재질과 빛, 구도와 움직임을 바꿔보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왜 별로지?

조명을 옆으로 옮기면 어떻게 보이지?

재질의 거칠기를 조금만 바꾸면
제품이 더 비싸 보일까, 오히려 플라스틱처럼 보일까?

이런 걸 계속 실험하는 일이 재밌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처음부터 결과물을 빨리 뽑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를 집요하게 R&D하는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력이 쌓여도 방향은 자동으로 생기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확신도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정도 일하고 나면
나는 이런 디자이너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선택지가 더 많아졌습니다.

3D를 더 파야 하나.

모션을 더 해야 하나.

브랜딩도 할 수 있어야 하나.

외주를 늘려야 하나.

개인 작업을 해야 하나.

포트폴리오는 작품 중심이어야 하나,
아니면 요즘 회사들이 원하는 AI 작업을 더 보여줘야 하나.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해본 적은 있는데,

그래서 나는 정확히 무엇을 잘하지?

이 질문에는 계속 말이 막혔습니다.

취업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비슷했어요.

저는 말을 잘하기보다
디자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적곤 했습니다.

말로 저를 설명하려고 하면
제가 실제로 해온 것보다 훨씬 평범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었거든요.

머릿속에는 분명 많은 생각이 있는데
막상 문장으로 꺼내려면 순서가 엉키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상태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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