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구사 낮은 사람이 AI를 서브자아로 쓰는 법

예상 읽기 시간: 약 8분

AI 서브자아를 만든다는 건 생각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머릿속에 흩어진 말을 꺼내 다시 정리해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저는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ㅠㅠ..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일단 꺼내다 보면
앞 이야기와 뒤 이야기가 섞이고?

중간에 갑자기 생각난 이야기를 넣었다가
처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기도 해요.

취업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늘 비슷했습니다.

“저는 말보다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사실 절반 정도는 고백에 가까웠어요.

저 자신을 문장으로 설명하는 게 어려우니
결과물을 보여주는 쪽이 훨씬 편했던 거죠.(근자감..?)


디자인할 때는 분명 알고 있는데, 말로 하면 사라졌어요

디자인 작업에서는
무엇이 마음에 들고 무엇이 이상한지 비교적 빨리 느끼는 편입니다.

조명이 조금만 더 옆으로 가면 좋겠다거나,
재질이 너무 플라스틱처럼 보인다거나,

예쁘긴 한데 우리가 찾던 이미지는 아니라는 것도 느껴요.

그런데 누군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물으면 갑자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냥.. 이쪽이 더 좋은데.

아까 것보다 이게 더 맞는데.

머릿속에서는 차이가 분명한데
문장으로 꺼내는 순간 굉장히 빈약해졌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여러 버전을 직접 만들어 보여줬습니다.

A와 B를 같이 놓고 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제가 R&D를 오래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말로 설명하는 대신 결과로 증명하려 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AI에게 처음부터 정리된 말을 하지는 않아요

제가 GPT와 대화하는 화면만 보면
말을 굉장히 잘 정리해서 사용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처음에는 생각나는 대로 적습니다.

문장이 끝나지 않기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중간에 전혀 다른 고민이 튀어나오기도 해요.

예전에는 이런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면
먼저 혼자 문장을 정리하는 데서 지쳤습니다.

그런데 AI에게는 일단 그대로 던질 수 있어요.

내가 지금 왜 답답한지,
어떤 결과가 마음에 안 드는지,
무엇을 하려다가 어디에서 막혔는지.

말이 조금 엉켜도
AI는 그 안에서 반복되는 단어와 고민을 묶어줍니다.

그러면 저는 정리된 문장을 보고 다시 판단해요.

이건 내가 하려던 말이 맞고,
이 부분은 너무 거창하고,
이건 내가 한 적도 없는 말이고,

여기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인데 빠졌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처음에는 덩어리였던 생각이 조금씩 분리됩니다.


AI가 제 생각을 만드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중요한 건
AI가 멋진 말을 써주는 것과
제가 제 생각을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AI는 그럴듯한 문장을 아주 잘 만듭니다. (지금 처럼요!)

문제는 너무 잘 만들어서
가끔 제가 실제로 한 생각보다 멋진 사람처럼 써준다는 거예요. (지금 처럼요!)

디자인 철학이 확립돼 있고,
명확한 시스템으로 작업하며,
모든 판단에 깊은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요.

읽으면 기분은 좋습니다.

근데 이거 진짜 나 맞나?

그래서 저는 AI가 정리한 문장을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해요.

엄근진

제가 실제로 겪은 일인지,
평소에도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냥 지금 읽기에 좋은 말이라 마음에 든 건 아닌지 다시 봅니다.

AI가 제 생각을 대신 만들게 하면
결국 그럴듯하지만 비어 있는 문장만 남아요.

반대로 제가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을
꺼내고 비교하고 수정하는 데 사용하면
AI는 꽤 좋은 거울이 됩니다.


저에게 AI는 조금 수상한 서브자아입니다

요즘 저는 AI를
저의 서브자아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걸 믿고 맡기는 분신이라기보다,

제가 말을 늘어놓으면
옆에서 화이트보드에 정리해주는 사람에 가까워요.

제가 놓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여러 생각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주고,
조금 전까지 한 말을 기준으로 정리해줍니다.

제가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는
현재 확인된 사실과 아직 모르는 것을 분리해주기도 해요.

물론 가끔은
하지도 않은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추가하고,

조금 고민한 일을
오랫동안 지켜온 철학처럼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상합니다.

혼자 두면 안 되고
계속 검수해야 하는 서브자아예요.


그래도 이전보다 제 생각을 더 많이 남기게 됐어요

AI를 사용하기 전에도
저는 디자인을 하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대부분 결과물 안에만 남아 있었어요.

왜 이 재질을 골랐는지,
왜 이 구도는 실패했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하는지.

작업이 끝나면 파일만 남고
판단 과정은 머릿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AI와 대화하면서
그 과정을 문장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잘 나온 결과의 프롬프트만 저장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잘됐는지,

실패한 결과를 버리는 데서 끝내지 않고
왜 실패로 판단했는지,

제가 막연하게 좋아하는 레퍼런스를 모으는 데서 끝내지 않고
어떤 조형 언어와 감정이 공통으로 들어 있는지.

예전에는 말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작업 기준으로 바꾸는 중입니다.


결국 말을 잘하게 된 걸까요?

AI와 함께라면
저도 말을 잘하는 디자이너가 된 걸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화할 때 갑자기 논리정연해진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한 번에 깔끔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에요.

여전히 일단 떠들고,
중간에 다른 이야기로 새고,
나중에 다시 돌아옵니다.

다만 예전에는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 생각까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꼈다면,

지금은 엉킨 상태로라도 먼저 꺼내볼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제가 반복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필요한 건
처음부터 완벽하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엉킨 생각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디자인으로만 보여주던 것들을 말로도 남겨보려고 합니다

저는 여전히
결과물로 보여주는 게 가장 편한 디자이너입니다.

그런데 결과물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기준으로 일했는지까지 모두 알 수는 없더라고요.

예쁘게 나온 한 장보다
그 장면에 도착하기까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겼는지.

어떤 실패를 겪었고,
다음에는 무엇을 확인하게 됐는지.

이제는 그런 것도
제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AI가 저 대신 말하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제가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디자인 감각과 경험을
AI와 함께 다시 들여다보고,

제 말로 남길 수 있는 상태까지 가져오는 것.

제가 생각하는 AI 활용은
지금은 이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사이트에도
완성된 결과만 모으기보다

제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무엇을 잘못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기준을 얻게 됐는지를 함께 기록하려고 해요.

말보다 디자인으로 보여주던 사람이
이제 디자인과 말 사이를 번역해보는 중입니다.

조금 떠벌떠벌하더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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